* “나는 우리 선조들이 당한 수모를 이를 갈며 보았다...더욱더 힘을 길러 강국이 되어야 겠다는 굳은 결의가 나의 가슴을 스쳐갔다....역사속에 만일이란 있을 수 없다.” (82.12.26)
* “17세의 이 나이에 나는 과연 무엇을 남겼는가?...오늘은 한해를 보내는 기분이 다른때와는 전혀 다른 생각이 든다. 올해는 무엇보다도 정신적 바램이 컸던 해라고 본다. 나의 생각 나의 사상은 점점 어떤 확고한 가치관을 통해서 한발 한발 나아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82.12.31)
* “오후에는 ‘도산사상’이란 책을 읽었다. 우리 민족의 선각자인 안창호 선생의 사상을 잠시나마 엿볼 수 있었다. “성실”이란 두 글자가 내 마음을 몹시 흥분하게 했다. ‘성은 하늘의 도리요, 성(誠)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인간의 도리라’그렇다. 인간은 모든 일에 완전할 수 없다. 인간의 참 모습은 최선을 다하는 것 그리고 또 한층 노력하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들이다.(83.1.3)
|
|
|
|
<My Life 1982.12.20.~1983.02.07>
|
또한신문에실린새마을수련회참가기와당시부모님께쓴편지에는수련을통한깨달음과국민과국가에대한이한열열사의성숙한인식이담겨져있다.
|
* “나와 사회와 국가를 이을 수 있는 밧줄을 잡아당겨야 한다”, “우리나라가 잘 살 수 있는 길은 개개인의 의식을 바로잡아.. 튼튼한 겨레의 건물을 짓는 것”
<고교생 특별수련기(1984)>
|
|
* “학과시간에는 ...국민의 한사람으로서의 올바른 자세를 배우며, 제 자신을 이기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 수련을 통하여 지금까지 제 자신에게 결여되었던 점을 보충할 수 있었고, 좀 더 성장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는 아버님, 어머님께 좀 더 걱정을 덜어드리고, 어엿한 자식이 될 겁니다.”
<이한열의 편지(1984)>
|
[이한열 열사 어머니의 기록]
이번복원된기록에는이한열열사뿐만아니라어머니의애끓는심정을알수있는기록도있다.
‘1987년6월9일5시5분경’으로시작하는어머니의글에서는학교로부터 위독한상황을전달받은순간부터중환자실에서임종을맞이하기까지 겪었던사건과감정이고스란히담겨져있다.
* “ 우리는 떨리는 걸음으로 중환자실 문으로 들어갔다. 우리 한열이가 왜 그래요? 정말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의식이 없고 코, 입, 산소 호흡기를 온몸에 착용해서 이름도 모르는 기계에 의해 호흡하고 있었으니...27일 동안을 말 한마디 못해 보고... 한열이는 7월 5일 2시 5분에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다.”
< 이한열 열사 어머니의 글(1987)>
|
[6월 항쟁 관련 기록]
6월항쟁과관련한기록에는사망이후의‘압수‧수색검증영장’과‘부검결과이물질규명중간보고’기록도포함되어있다.
이중중간보고는이한열열사의당시주치의가부검과정을수기로 남긴1페이지기록으로, 이열사의머릿속에서발견된이물질의분석내용과직접적인사인이‘최루탄피격’임을밝히고있다.
아울러‘민주국민장실황’이녹음되어있는오디오테이프(오디오파일)를복원했다.
오디오파일에는‘1987년7월9일거행된이한열열사의영결식에서故문익환목사의추도사와이한열열사어머니의오열하는음성등을확인할수있다.
※ <붙임2> 이한열 열사 민주국민장 실황 영상 참고
|
|
|
|
< 유월항쟁 중 명동성당 시위사진(1987)>
|
<이애주* 살풀이춤(1987)>
|
< 이한열 영결식 백양로 인파(1987)>
|
<이한열 열사 민주
국민장 실황(1987)>
|
* 이애주(1947~2021) :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전 서울대 교수, 이한열 열사 영결식 때 운구행렬을 이끌며 한풀이춤을 춤. 이후 ‘민주화의 춤꾼’으로 불려짐
이번에복원된기록들은지난해5월이한열기념사업회에서국가기록원에 복원지원을요청하여, 올해2월중순부터약3개월에거쳐완성됐다.
당시